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문단 편집) == 미국의 오판과 인질극 발발 ==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는 이란의 이러한 경직된 입장을 오판해 신병 치료를 이유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전 국왕]]의 입국을 허가함으로 이란의 급진 강경파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호메이니는 팔레비의 송환을 강경하게 요구했고, 팔레비 왕의 지병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의사단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으나 이미 이란 혁명으로 실권하기 전 프랑스 의료진으로부터 암 선고를 받은 상태였기에 의사단 파견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호메이니는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팔레비를 따르는 왕당파는 물론이거니와 반팔레비 운동을 같이 했던 민주주의 세력까지 대대적으로 숙청했는데, 샤(팔레비)는 1979년 5월 [[궐석재판]]에서 본인과 본인의 일가족들인 레자 팔레비 전 왕태자와 파라 디바 전 왕후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 궐석재판에서 구 팔라비 왕족들 전원이 다 사형선고를 받았는지는 현재까지도 서방내 일각에서도 논쟁 중이다. 팔라비 2세 전 이란 국왕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부터, 팔라비 2세 전 이란 국왕 뿐만 아니라 배우자인 파라 황후와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 파라나즈 팔라비 전 공주 등 그의 자녀들까지 전부 다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대체적으로 팔라비 구 왕가의 이란 탈출 이후에 팔라비 2세 전 국왕에게 선고되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아내와 자녀 등 나머지 구 왕가 일원들에게까지도 사형이 선고됐는지는 불확실하다.] 팔레비는 암 말기라서 송환되더라도 사실상 오래 못 살고 곧 죽을 운명이었다. 차라리 팔레비를 송환 했다면 미국은 굳이 이란과 적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팔레비를 송환한다면 미국 영향 하의 독재자들에게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는 신호를 주는 꼴이므로 그것 또한 선택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 볼때 이미 권력도 잃고, 죽을 날도 얼마 안남은 그래서 아무 쓸모도 없는 팔레비의 미국 입국을 허용한 것 자체가 애초에 실수였던 것이다. 이란 정권을 장악한 이슬람 급진강경세력들이 얼마나 구 팔레비 체제를 증오하고 있었는지, 미국 수뇌부가 전혀 파악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카터 행정부의 고위층들이 퇴임후에 한 인터뷰들을 보면 팔레비의 미국 입국에 대해서 이란 신정부가 반발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의례적인 멘트 정도로 생각했다고.] [[파일:us-embassy-tehran.jpg]] 결국 1979년 11월 4일, 테헤란에서 팔레비 신병 인도를 요구하던 과격파 학생 시위대가 시위 도중 미국 [[대사관]]으로 난입, 점거함과 동시에 약 70여명의 [[외교관]]을 인질로 억류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미 급진 강경파가 장악한 이란 혁명 정부는 미국과 일전불사의 초강경 자세로 일관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이란산 원유 수입금지 조치에 이란의 대미 석유 금수 조치, 이란의 재미 예금 전액 인출 및 재이란 미국 투자의 국유화 조치에 미국이 재미 이란 공적 자산 동결조치로 응수하는 등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었으며, [[아라비아 만]]과 [[인도양]]에서 [[미 해군]]의 무력 시위가 전개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미국 내 이란 중앙은행 예금에 대한 동결 조치로 인해 이란의 중앙 은행은 미국의 [[JP모건 체이스|체이스은행]]에 이자 지급을 못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체이스은행은 이란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하였다. 일련의 사태로 미국과 이란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 이란은 미국에 대한 단죄 및 사과요구까지 확대시켰고 미국 역시 미 대사관 난입과 인질사태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라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국과 이란의 이러한 팽팽한 대립은 잠시나마 온건파의 중재로 협상의 기미가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호메이니]]가 강경한 자세를 내비침으로서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미국은 1980년 4월 7일에 공식적으로 이란과 단교했으며 미국 내 이란 외교관들을 추방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육/해/공/해안경비대 [[특수부대]]를 동원해서 인질을 구출하는 '''[[독수리 발톱 작전]]'''을 시도하였으나, 계획차질과 항공기 충돌사고로 애꿎은 미군 수송기 승무원 8명의 목숨만 앗아가는 결과만 얻고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